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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_커텐 찾아 동대문 삼만리 (feat. 침구까지) ♡오복커튼&신흥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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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my 작성일24-08-21 11:54 조회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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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힐코 신흥사다이렉트 필터 및 힐리아드 부품 한국총판 힐코 코리아 입니다~~(힐코 필터 한국 총판,힐코 및 힐리아드 부품 및 AS 전문)최근 인기리에 방여되고 있는 KBS의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많은 시청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바로, 거란의 2차 고려 침입때 맹활약하고 장렬히 전사한 양규 장군입니다.위키 대백과 사전에서 양규 장군을 검색해 보면​위와 같은 내용으로 간력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아래에 각종 전과와 활약상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하지만, 왠지 그리 와 닿지 않는 것이 항상 백과사전의 인물평~!!그렇다면 양규 장군에 대하여 자세하게 한번 알아 보겠습니다~!​양규(楊規) 장군은 정확한 탄생년도는 알수 없으나, 대략 960년~970년 사이에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지방 호족의 자제로 무관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나고려 묵종때 부터 무관으로 임명되어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강조가 도순검사로있을 시에 형부 낭중이 되어 현재로 치면 중령~대령 계급으로 군부의 중요 보직을 받으면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이후, 도순검사였던 강조의 정변에 협조하지 않고, 맡은 자리를 지켰으며, 강조가 정변으로 묵종을 끌어내리고 현종을 즉위시키고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강조의 정변에 신흥사다이렉트 가담하지 않은 사람 중 거의 유일하게도순검사로 승진하면서 고려 북방 국경의 최고 요충지인 흥화진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거란의 내원성과 가장 가까우며, 압록강의 건너자마자 바로 위치하는흥화진은 고려 북방 국경선의 가장 최일선에 위치한 진지로서그 중요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최고 요충지로서, 만주와 중국에서 침략시에첫번째로 맞이하게 되는 고려군의 진지 입니다.흥화진 백마산성 배치도양규 장군은 흥화진에서 주둔하면서, 압록강 주변에서 거란군의 정찰병력이자주 출몰하고, 거란으로 상행을 갔다 돌아오는 상인들의 정보등에서말을 살찌우고 있으며, 거란의 각 부족에서 내원성으로 젊은이들이 차출되고군량미 창고가 활짝 열려 습기를 말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가인 강조와 함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양규와 강조 및 고려 조정의 걱정되로, 결국 1010년(현종 원년) 거란의 성종이친정에 나서면서 무려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남하합니다.-------------------------------------------------------------------------------------------여기서 중국측의 기록을 다소 무시해야 하는 것이 중국은 군대의 숫자를기록할때, 총 병력을 기록하는 관습이 있습니다.즉, 거란의 40만 병력은 전투병 약 10만,보급 및 군수지원 약 10만, 그리고 나머지 20만은 전투병의 하인,노비 등을 모두 포함한 숫자로서,실제 전투병력인 현재로 신흥사다이렉트 치면 직업군인은 10만이 최대치가 아닌가 합니다.거기에, 중국 민족 특유의 뻥튀기 문화가 있으니 거란의 40만 대군은실질적으로 전투병 7만에 보급병 5만,비전투원 5만 정도가 유력합니다.반면, 고조선,고구려,신라,백제 등의 시대부터 한국내 민족국가들은순수한 전투병력만 기록하였으며, 이에 따라 2차 거란 침입전쟁에서고려군이 모은 전투병 5만은 순수한 전투병력, 즉 직업군인 이었으며,광군이라 하여, 농민병들은 현재 개념으로 민방위군 개념으로서광군이 최초 3만명이 동원되었고, 전쟁 중반에 약 2만 정도 보충되어고려군은 직업군인 5만에 민방위군 5만 병력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거란군은 흥화진에 당도하여 먼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양규 장군이 단호히 거부하자흥화진 성문 앞에서 주변 촌락의 고려인들을 포로로 잡아와, 잔혹하게 살해하면서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고려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려 하였습니다.이에 양규 장군은 고려군을 희롱하는 거란병사들에게 활을 쏘아 죽이면서결사항전을 부르짖었고, 흥화진에 소속된 3,000여명의 장병들과함께 맞서 싸우게 됩니다.​거란군은 투석기와 공성차 등의 공성 무기를 사용하여 흥화진을 공격하였으며, 양규 장군과 고려군사들은 활을 쏘며, 응전하면서성내의 투석기로 화염병을 만들어 거란군 진영으로 쏘아 올리면서분전을 거듭했습니다~!​첫째날 전투가 끝나고, 잠시 적군이 물러가자 한숨을 돌리려고 신흥사다이렉트 하지만,압도적인 병력의 우위에 있는 거란군은 2파,3파 공격진을 계속 내보면서피로에 지친 흥화진 군사들을 계속 공격합니다.​이윽고, 7일동안 버텨낸 흥화진의 양규 장군과 고려군사들은거란군이 흥화진을 포기하고 귀주와 통주 방면으로 진격하면서안도의 한숨과 살았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지만, 고려 본진이 있는 통주와 연락이 닿지않아 보급이나 병력 충원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게 됩니다.​한편, 당사 고려로서는 쥐어짜듯 준비한 20만 대군을 모은 강조는통주성 앞의 삼수체에서 거란군과 대회전을 치르기로 결정하고,새로운 무기인 검차를 발판으로 거란군의 1차 공격을 격퇴하게 됩니다.(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 직업군인은 약 8만~10만 이며, 광군(농민병)이 약 10~12만 정도로 보여집니다.)​검차는 고려시대에 발명된 무기로서, 거란 및 여진등의 기병에 대항하고자수레에 긴 창과 검을 박아넣어 말의 몸통을 공격하며, 보병들과의 접전에서는긴 창을 이용하여 공격의 거리를 늘리고 집중하여 돌파하기에 좋은무기로서 강조가 벌인 삼수체 전투에서 초반에 거란군을 막아내는데 최고의 활약을 합니다.​하지만, 거란군과의 격돌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강조는 거란군을우습게 보며, 본진의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거란군의 별동대에 의하여본진이 급습당하면서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거란군 본진으로 끌려간 강조는 신흥사다이렉트 수차례에 걸쳐 매질과 고문을 당하면서도거란의 신하가 되라는 거란 성종의 요구를 거부하고 참수형에 처해집니다.강조의 통주성 대회전 패배로 인하여, 고려군은 와해되어 뿔뿔히 흩어지게되며이후 귀주성을 제외하고 통주성과 곽주성 등 모든 고려군의 방어선이함락되고 거란군은 고려의 마지막 방어선인 서경성을 포위하게 됩니다.​이 때부터 양규장군의 히어로급 활약이 펼처지게 됩니다~!​흥화진에서 800명의 병사와 함께, 함락되지 않은 귀주로 찾아간 양규장군은약 1500명의 병력을 요청하나 귀주성도 부족한 병력이라 내어줄 수 없다고 하자고민하던 중에 거란군이 서경성을 마침내 함락하고 개경까지 다이렉트로진군한다는 정보를 듣고 거란군의 길어진 보급선의 핵심인 곽주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곽주성에 대한 정찰을 가던 중에 삼수체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던1,000여 병력을 수습하고 총 1,800여명의 병력으로 곽주성을 지키는 6,000명의 거란군의 방심을 틈타 곽주성을 탈환한 양규 장군은전력을 재정비한 후에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양민들을 구출하려는계획을 세우게 됩니다.​양규는 흥화진 방어전과 곽주성 탈환작전작전까지3개월간 총 7번의 대혈전을 치르게 됩니다.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열전에서 기록을 차용하면,​양규가 흥화진을 7일 밤낮으로 방어하여,지켜냈다.양규가 곽주성을 1천여 병력으로 탈환하였다.양규와 구주 별장 김숙홍과 중랑장 보량이 신흥사다이렉트 거란군 1만명 참살하였다.양규가 무로대에서 적군 2천여명을 사살하고 포로 3천여명 구출하였다.양규가 이수와 석령에서 교전하여 적군 2천 5백명을 사살하고 포로 1천여명 구출하였다.양규가 여리참에서 하루 세번 싸워 세번을 다 이기고 적군 1천여명 사살, 포로 1천여명 구출하였다.양규가 애전에서 교전하여 적군 1천여명 사살하고,포로 2만5천명을구출하였으나, 거란 아율융서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애전은 쑥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는 의미이며, 추정하기로는 평안남도 철산군 일대라고 합니다.이렇게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가졌던 거란군을 맞이하여7전 7승의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애전 전투에서 고려인 포로 25,000명의탈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오랫동안 함께 싸운 별장 김숙홍과 함께시간끌기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애전은 쑥이 많은 고을이라는 뜻으로, 양규장군이 최후의 전투를 벌이면서수많은 거란군이 그 일대를 초토화 시켜, 양규장군이 전사한 이후에고을 주변에 쑥만 가득했다고 하여, 애전 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합니다.)​양규 장군과 별장 김숙홍은 뛰어난 지략과 탄탄한 무력으로 철군하는거란군의 꼬리를 잡아 포로로 끌려가던 고려인 3만여명을 구해내고,현재 평안북도 철산군 일대라고 파악되는 애전 전투에서 온몸에 화살이50여대가 꽂힌 채로 마지막까지 활 시위를 신흥사다이렉트 당기다가 힘이 다해전사했다고 합니다.​거란군이 물러난 이후 1019년(현종 10) 현종은 양규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1024년(현종 15)에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습니다.​이와 함께, 양규 장군의 전공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교지를 직접 지어양규 장군의 부인과 아들에게 보내었고, 양규 장군을 닮아 용맹하였던 아들 양대춘을 중히 여겼으며, 그의 증손자,고손자까지 벼슬을 내렸다고 합니다.한편, 양규 장군은 고려시대 최고의 호칭인 삼한벽상공신과 동급의삼한후 벽상공신으로 봉해지기도 합니다.​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삼한공신 중에서도 신흥사(新興寺)의 공신당(功臣堂)에 초상화가 걸린 자들을 특별히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하였는데,삼한후벽상공신은 삼한벽상공신에서 후(後)가 추가되었으니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에 최고의 공을 세웠다는 뜻이 됩니다.​고려의 10대 왕인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은 양규의 공을 기려 공신각(功臣閣)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두게 하였는데, 이러한 처우는 당시 고려에서 양규 장군의 업적을 하늘 높이 칭송하고그의 희생을 오래도록 알리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현재 공신각이 있던 신흥사는 북한 영토에 위치하여 있지만, 보존되지 못하여 그 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고려를 뒤집어 조선을 세우면서, 고려에 대하여 신흥사다이렉트 좋지 않은 시각을가졌던 조선시대에서도 양규 장군은 그 무용을 칭송 받습니다.​조선 세조때에 중신들이 왕에게 간언하기를 민족의 영웅인 양규 장군을무성묘에 봉하여 후세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며,세조가 이를 허락하여 신라의 김유신,고구려 을지문덕,고려의 유금필,강감찬,윤관,조충,김경손,조선의 하경복과 최윤덕 까지 우리 역사의 쟁쟁한무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하였으며, 양규 장군을 칭송하였다고 합니다.​신흥사 공신각에 대한 정보가 없는 현재 시대에고려 거란 전쟁에서 활약한 강감찬 장군의 초상화는다행히 전해지지만, 양규 장군의 초상화가 없는 것이안타까운 현실입니다.​현재 KBS에서 방영하는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역을 맡은지승현 배우가 남자답고 호승심 가득한 양규 장군 역활을 무척잘 소화하고 있어, 드라마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 같지만,곧 양규장군의 최후가 드라마에서 그려질 예정이라 아쉬울 따름입니다.​이제까지 고려사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인 양규장군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강감찬 장군의 그늘에 가려져, 잊혀져 가던 우리 민족의 영웅인양규 장군이 다시 재조명 받게 되면서, 저 역시 양규장군의 활약상에 감명을 받았습니다.​호국의 충신 양규장군이 지켜낸 우리 강토~~우리 후손들이 더욱 더 소중히 여기고, 양규 장군과 같은애국심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신흥사다이렉트 발전에 더욱 더 노력해야 하겠습니다~!​#양규장군#고려거란전쟁양규#양규장군활약상#양규장군묘#양규장군초상화#양규장군전공#고려영웅양규장군#고려김숙홍별장#여요전쟁#거란2차침략#곽주성전투#귀주성전투#흥화진전투#양규장군최후#양규장군묘#신흥사공신각#호국명장양규장군#양규장군후손​#힐코필터#힐코부속#힐코부품#힐리아드발전기#힐리아드부속#힐리아드부품#힐코한국총판#힐코한국대리점#힐리아드한국총판#힐리아드한국대리점#힐코코리아#hilco#hilli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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